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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로 돌아가라>
    철학 2017. 9. 5. 18:05

    들어가기 전에,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 에서 플라톤을 위험한 인물이라 말했습니다. 열린사회를 막는 잘못된 권위, 체제, 적 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로 돌아가라> 논문 도 그와 맥락을 같이하는듯이 보입니다. 


    I
    왜냐하면 내가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순하고 솔직한 합리성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합리성’이 그렇게 많이 논의된 까닭은 어떤 점에서일까? 그들의 질문들이 단순하고 대담했던 점도 그 이유의 일부분이겠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앞으로 내가 논증하려고 하는 것처럼—이오니아학파에서 처음으로 발전된 비판적인 자세라는 것의 나의 논제이다.     


    p. 32-33






    위에서 말한 '이오니아 학파' 에 대해서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읽은 바 있습니다. 이오니아 학파는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에 걸쳐 이오니아의 밀레토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철학에서 자연철학의 일파입니다. 
    서양철학은 기본적으로 본질 (실체, 원질, 아르케)을 찾는 끊임없는 과정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들의 철학소재는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근본적인 요소(아르케)가 무엇인가' 에 대한 호기심이었죠.


    칼 세이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탈레스로부터 시작된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은 머리로만 생각하는 그리스 본토의 주류철학과는 달리 철저히 실험중심의 철학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주류철학에게 천대당하였고 아직까지 그리스 본토의 주류철학 영향때문에 실험을 천대하는 문화가 잔존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대답하려고 노력했던 질문들은 처음에는 우주론적인 질문이었으나 인식론에 관한 질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철학이 우주론과 순수한 인식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나의 지론이다.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적어도 하나의 철학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세계의 부분인) 우리들 자신과 그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관한 문제이다. 모든 과학은 우주론이며, 내가 보기에 과학의 관심 못지않게 철학의 관심도 오로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앎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증대시키려는 대담한 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p. 33




    여기서 말하는 인식론은 인식에대한 인식, 즉 안다는것에 대한 앎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인식이 모여 축적된것을 지식이라 부릅니다. 지식이 체계화되면 그것을 Science 라고 부르지요. 현대엔 Science를 과학이라 부르지만, science는 '지식'이라는 뜻의 라틴어 scientia에서 왔으며, 이는 '안다'(I know)는 뜻의 접두사 scio-에서 나왔습니다.  중세로부 계몽주의시대까지, science나 scientia는 모든 종류의 체계적이거나 정확하게 기록된 지식을 가리켰으며, 따라서 그 무렵에 과학이란 철학이라는 단어의 넓은 의미로부터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및 이탈리아어 등의 몇몇 언어에서는 현재까지도 이 구별이 명확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엔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이 그러한 추구를 포기할 때, 즉 그것이 지나치게 전문화되어 세계의 수수께끼들을 알려하지 않고, 그것들에 경탄하기를 그만둘 때 그들의 모든 매력은 상실된다. 전문화는 과학자에게는 큰 유혹일 수도 있다. 철학자에게 있어서 전문화는 치명적인 죄가 된다.
    p. 33




    여기까지 포퍼는 현대의 전문화되고 미분화된 철학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고도로 전문화된 분야는 그것을 세상과의 유리시킵니다. 인간의 삶과 그 삶이 담겨있는 세계를 고민하지 않고 속칭 '그들만의 리그' 를 펼치는것을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디자인의 영역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전문화는 차별화를 지향하는 디자이너에게는 큰 유혹일 수 도 있습니다.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진다는 것은 강력한 무기를 쥐는것처럼 느껴지니 말입니다. 하지만 대중과 소통하고 그들을 위해 일을하는 디자이너에게 있어서 전문화는 역시나 치명적인 죄가 되지요.





    II
     
    나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우주론적인 이론들에 관심을 갖되, 그 이론들이 이른바 변화에 관한 문제의 전개와 관계되는 범위에만, 그리고 인식의 문제에 관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접근방법—그들의 이론적인 접근방법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접근방법—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범위에만 국한시킬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인식 이론과 실천이, 그들이 자신에게 제기했던 우주론적 질문들 및 신학적인 질문들과 어떻게 관계되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식론은 ‘이것이 오렌지라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 또는 ‘내가 지금 지각하고 있는 대상이 오렌지라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인식론은 ‘세계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또는 ‘신들에 관한 어떤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로부터 출발했다.
    p. 34


     여기서 포퍼의 주장을 간단히 말해볼 수 있습니다.
    우주론적 인식 <-> 쓸데없는 (오렌지에 비유된) 질문들





    III
     
    전통적인 경험주의적 인식론과 전통적인 과학사의 편찬은 둘 다 모든 과학의 관찰에서 출발해서 서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론으로 나아간다는 베이컨 철학의 신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초기 철학자들에 대한 연구로부터 알 수 있다.
    p. 35
     
    그러나 그 사상들 중 대부분은, 그리고 그것들 중 최상의 것은 관찰과는 무관하다. 지구의 모양과 위치에 관한 이론 중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자. ‘지구는 배처럼 그것이 떠 있는 물 위에 떠받쳐져 있으며, 지진이란 물의 움직임으로 인한 지구의 동요를 말한다'(A15)고 탈레스[Thales of Miletus (/ˈθeɪliːz/; Greek: Θαλῆς (ὁ Μιλήσιος), Thalēs; c. 624 BC – c. 546 BC)]는 말했다. 의심할 바 없이, 탈레스는 그 이론에 도달하기 전에 배의 흔들림뿐만 아니라 지진을 관찰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의 요점은 지구의 떠받침이나 부유 상태, 그리고 지진을 지구가 물 위에 떠 있다는 추측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p. 35


     
    이제부터 포퍼는 또하나의 대립개념들을 가져옵니다. 
    바로 관찰 <-> 추리 입니다. 이부분이 제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입니다.
    위에 칼 세이건은 '이오니아 학파는 철저히 실험 중심적' 이라고 말했다 썼습니다.
    그럼 칼 세이건은 실험을 중요시 여기는건가? 하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랬기때문에 여기까지의 텍스트를 읽는데 어려운점이 많았고 확실히 이해도 되지 않았었죠.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기위해 2가지 생각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1. 칼 포퍼는 칼 세이건이 뭐라하든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논지를 펴 나가는 것이다.
    이오니아 학파에 대한 불변의 정의가 있는것도 아니고,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영역또한 다르기때문에 그냥 그렇게 주장한것이라 생각 할 수 있습니다.

    2. 칼 세이건은 천문학의 영역에서 말한것이고, 천문학에서 '초자연적인것' 가령 별로 점을 친다던가 하는 미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이오니아 학파가 실험을 중시한다 말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칼 포퍼는 이오니아학파가 중요시 여긴 것중에는 '자신의 가설을 기꺼이 수용하는 탄력적 자세' 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후에 읽을 수 있습니다.) 실험 과 관찰 의 단어의 뜻을 고정적으로 갖고있으면 생기는 오해인것 같습니다. 

    우리는 '관찰' 을 '1차원적으로 단순히 눈에 보이는것만을 믿기' 라는 뜻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베이컨 신화의 기능은 관찰이 우리의 과학적 지식의 ‘참된 원천’이라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과학적 진술들이 왜 참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과학적인 진술은 가설이나 짐작 또는 추측이라는 것과 (베이컨의 것을 포함해서) 이들 대부분의 추측들이 거짓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일단 깨닫게 되면, 베이컨의 신화는 부적절하게 된다. 왜냐하면 과학의 추측들—아직도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은 물론, 거짓으로 밝혀진 것들—이 모두 관찰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 36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 (/əˌnæksɨˈmændər/; Greek: Ἀναξίμανδρος Anaximandros; c. 610 – c. 546 BC)]의 지구 부유설은 여전히 매우 직관적이다. 그러나 관찰에 의한 유추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있다. 사실상 그것은 반-관찰적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 어떤 것에 의해서도 떠받쳐져 있지 않으나, 그것이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등거리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정지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의 형태는 …… 북의 형태와 같다. ……. 우리는 그것의 평평한 표면 한쪽을 거닐고 있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 반대편에 있다.'(A11)
    p. 36

    아낙시만드로스는 지구가 북처럼 생겼다는것을 관찰하지 않고 (눈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떠올려냈기에 반-관찰적이라 말하는것입니다.
    우리 눈에 관찰되는것은 평평하고 끝없는 땅 뿐이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이와 같은 생각은 인간의 전 사상사 중에서 가장 대담하고 가장 혁신적이며 가장 놀라운 생각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아리스타르쿠스(Aristarchus)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의 이론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아낙시만드로스가 내디딘 걸음은 아리스타르쿠스와 코페르니쿠스가 내디딘 걸음보다 훨씬 더 어렵고 대담한 것이었다. 지구가 우주의 가운데서 자유롭게 균형 잡혀 있다고 상상하는 것과, 그리고 ‘그것이 등거리 또는 균형 상태 때문에 정지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낙시만드로스를 부연 설명하는 대로) 심지어 뉴턴의 비물질적이면서도 비가시적인 중력에 대한 생각을 어느 정도는 얘기하는 것이다.
    p. 37






    IV
     
    아낙시만드로스는 어떻게 이런 주목할만한 이론에 도달했을까? 의심할 바 없이 관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추론에 의한 것이다. 그의 이론은 밀레토스학파(Milesian School), 즉 그의 스승이자 친척인 이오니아학파(Ionian School)의 창시자 탈레스가 그에 앞서 해답을 제공했었던 문제 중의 하나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나는 아낙시만드로스가 탈레스의 이론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에 도달했다고 추측한다. 믿건대, 이 추측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의 구조를 고찰함으로써 뒷받침될 수 있다.
    p. 37
     
    무엇이 아낙시만드로스로 하여금 지구가 북 모양이 아닌 공 모양을 하고 있다는 이론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였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체로 지구의 표면이 평평하다고 그에게 가르쳤던 것은 바로 관찰에 의한 경험이었다. 따라서 그를 지구의 형태에 관한 거의 참된 이론으로 이끌었던 것은 탈레스의 이론에 대한 사색적이면서도 비판적인 논증과 추상적이면서도 비판적인 검토였다. 그리고 그를 잘못된 길로 인도한 것은 관찰에 의한 경험이었다.
    p. 39



    결국 끝에가서 관찰이 아낙시만드로스의 발목을 잡아 그는 지구를 북 모양으로 생겼다고 유추하는데 그쳤다는것이 포퍼의 주장입니다. 땅이 평평해보이는 관찰결과에서 벗어나 모든것이 지구의 등거리에 있다는 생각을 계속 뻗어나가면 결국 지구는 둥글다는데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VI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들이 경험적이라기보다는 비판적•사색적이라는 데에는 어떠한 의문의 여지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진리로의 접근을 놓고 생각한다면, 그의 비판적이고 추상적인 사색은 관찰적인 경험이나 유추보다 더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베이컨의 추종자들은 이것이 바로 아낙시만드로스가 과학자가 아니었다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가 초기 그리스의 과학보다는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철학은 사색적이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아는 것처럼 과학은 사색적인 방법이 관찰적인 방법으로 대체될 때에, 그리고 연역법이 귀납법으로 대체될 때에만 비로소 시작된다.
    물론 이 대답은 결국, 이론들의 과학성 여부는 정의상 그 기원을 관찰이나 이른바 ‘귀납적인 절차’에 둔다는 논제에 도달한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정의에 속하는 물리학 이론은 거의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기원의 문제가 왜 이 관계에서 중요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어떤 이론에 관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갖는 설명력과 그 이론이 시험과 비판을 견디어내는지의 여부이다. 이론의 기원과 그것이 도달된 방법—흔히 말하듯이 귀납적인 절차에 의한 것이든지 아니면 직관의 작용에 의한 것이든지 간에—에 관한 문제는 특별히 그 이론 창시자의 전기를 쓰는 사람에게는 아주 흥미가 있을지 모르나, 그것의 과학적 지위나 성격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pp. 40-41


     여기까지 1차시 입니다. 다음주 화요일에 뒷부분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포스트는 국민대학교 철학의 물음들 김명석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스스로 정리한 것입니다.
    제가 오해했거나 섣불리 잘못 말했거나, 놓친점이 있다면 부디 댓글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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